내가 처음 KODEX 200을 산 그날 — 기억은 거짓말을 한다

며칠 전,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KODEX 200을 처음 산 게 언제더라?
머릿속에 그림이 있긴 했다.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하고, 코스피가 박살이 난 그 시기. 한참 지난 후에 헌재가 파면을 결정하고, 이재명이 "코스피 5000"을 외치던 무렵. 그 어딘가에서 나는 큰 마음을 먹고 처음으로 코덱스 200을 꽤 큰 금액으로 담았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막상 글로 옮기려고 보니 시점이 자꾸 흐릿했다. 계엄이 12월, 탄핵 가결이 12월, 헌재 파면이 4월 —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내가 매수 버튼을 눌렀는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를 회상해보면
2024년 가을부터 나는 한창 주식 공부에 빠져 있었다. 책을 사 읽고, 유튜브 채널을 돌리고, 매크로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외환위기·금융위기·코로나 폭락 같은 큰 사건마다 시장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사례를 모았다. 언젠가 폭락이 오면,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리라 — 그런 다짐을 매일 새로 다지고 있었다.
그러던 2024년 12월 3일 밤. 한국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캐나다에서 그 소식을 들은 나는 한참 동안 화면만 보고 있었다. 6시간 만에 계엄은 해제됐지만, 시장은 그날부터 무너지기 시작해 12월 9일 코스피 2,360선까지 박살이 났다. 4분기 내내 약했던 시장이 진짜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고 며칠 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그 다음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헌재는 변론을 시작했고, 한 회 한 회가 길게 늘어졌다. 정치권은 매주 다른 시점을 점쳤다. 3월 초니, 중순이니, 아니면 더 늦어질 거라느니. 시장은 그 모든 추측에 출렁였다.
그 길고 지난한 시간에 나는 처음으로 KODEX 200을 꽤 큰 금액으로 담았다. 그 후 이재명이 당선됐고, 코스피는 가파르게 올라갔다. 나는 그 흐름에 올라타서 — 그동안 묵혀두기만 했던 미국 S&P 500 ETF를 익절하고, 국장으로 본격적으로 갈아탔다.
글로 옮기려고 보니 — 기억이 흐릿했다
여기까지 회상해놓고 보니 어딘가 이상했다. 큰 그림은 맞는데, 구체적인 순서가 자꾸 엉켰다.
- 내가 KODEX 200을 산 게 헌재 파면 전이었나, 후였나?
- 이재명 "코스피 5000" 발언을 들은 후 들어간 거였나, 전이었나?
- 그날의 코스피는 얼마였지?
뇌가 만든 그럴듯한 줄거리는 있는데, 정확한 사실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매매기록을 펴봤다
다행히 삼성증권에서 거래내역서 PDF를 받아둔 게 있었다. 2025년 1년치 전체 매매 — 매수·매도·예수금 입출까지 전부 들어있는 자료. 거기에서 KODEX 200 첫 매수일을 찾았다.
2025년 2월 28일.
333주, 단가 35,075원, 약 1,168만 원. 그게 내가 처음 KODEX 200을 큰 금액으로 담은 날이었다.
이 날짜를 보고 잠시 멍해졌다. 내 기억과 어긋나서 그랬다.
그날의 정치 상황을 검색해봤다
2월 28일 앞뒤 1주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봤다.
- 2월 25일 — 헌재에서 윤석열 탄핵심판 11차 변론(최종 변론) 종결. 8시간 16분간 진행. 평의 시작. 정치권은 3월 중순 선고를 점치는 중이었다.
- 2월 28일 — 검찰이 비상계엄 가담 군경 9명을 불구속기소. "결과는 시간 문제" 라는 시그널이 시장에 깔리던 날.
- 4월 4일 — 헌재 파면 결정 (그러니까 내가 산 5주 뒤였다).
- 5월 초 — 이재명이 "코스피 5000" 공약을 본격적으로 띄우기 시작. 내가 산 2달 뒤였다.
그러니까 내가 KODEX 200을 산 동기는 "이재명 5000피 발언 듣고" 가 아니었다. "헌재 파면 보고 안심해서" 도 아니었다. 둘 다 내가 들어간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진짜로 들어간 이유는 — 변론 종결을 보고, "이제 결과는 시간 문제다, 시장은 그 결과를 빠르게 가격에 반영하고 있다" 였다. 코스피가 12월 저점 2,360에서 2,500선까지 7% 회복하던 그 자리에, 나는 들어간 것이다.
기억은 거짓말을 한다
기억이 정직하지 못한 게 아니다. 기억은 — 결과를 알고 난 뒤에 — 줄거리를 다시 짠다. 결과에 맞게 동기를 역설계한다.
이재명 5000피 발언이 결과적으로 내 베팅을 정당화해줬다. 코스피는 11월에 4,100을 찍었고, 나는 11월 12일 KODEX 200 절반을 익절했다 — 평단 38,400원에 산 걸 57,760원에 팔았다. +50% 회수.
너무 멋진 서사라서, 내 뇌는 그 결과에서 동기를 거꾸로 만들어냈다. "이재명 발언 보고 5000피 갈 것 같아서 들어간 거지"라고. 진짜로 들어간 이유는 기억 속에서 슬그머니 지워지고, 결과에 어울리는 동기가 자리를 차지했다.
기록이 없었다면 — 평생 거짓말을 믿고 살았을 것이다
만약 거래내역서 PDF가 없었다면? 그날의 정치 기사를 검색해보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이재명 5000피 발언 듣고 큰돈을 넣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폭락이 왔을 때 — 그 잘못된 기억을 근거로 또 다른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때 정치인 발언 듣고 진입한 게 먹혔으니, 이번엔 어떤 발언을 들으면 될까?" 하면서.
기록이 없으면 학습할 수 없다. 학습 못 하면 같은 자리에서 매번 다시 시작한다. 투자에서 복리가 작동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이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이 글을 쓴다
다른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날의 진실이 떠올랐을 때, 그걸 박제하고 싶었다.
1년 후, 5년 후의 내가 "그때 왜 들어갔지?"라고 물을 때 — 이 글이 답해주도록. 결과에 맞춰 다시 짜인 줄거리가 아니라, 그날의 진짜 동기가 남도록.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럴듯한 거짓말이 된다. 그걸 막는 방법은 글로 적어두는 것 하나뿐이다.
마무리 — 기록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이번 일로 한 가지 다짐이 생겼다.
매매하기 전, 매매한 직후 — 한 줄이라도 적어두자. 그날의 시장이 어떻게 보였는지, 무슨 뉴스를 봤는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매수가·매도가 옆에 그날의 동기를 같이 박제하자.
수익이 났을 때보다 손실이 났을 때 그 기록이 훨씬 비싸다. "내가 왜 이걸 샀더라"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투자자의 기억은 — 안 적어두면 도둑맞는다. 결과에 의해 도둑맞는다.
기록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우리, 같이 살아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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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 survive. We can surv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