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KODEX 200을 절반 익절했는데 — 왜 했는지 기억이 안 났다

며칠 전, 매매기록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었다. 11월에 KODEX 200 보유분 절반을 한 번에 익절한 기록이 있었다.
평단 38,400원에 산 걸 57,760원에 팔았다. +50% 수익.
그 행위 자체는 칭찬할 만했다. 문제는 — 그날 내가 왜 팔았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다시 기록을 의지할 시간
직전 글에서 "기억은 거짓말을 한다"고 적었다. 결과를 알면 뇌가 동기를 역설계한다고. 그래서 매매하기 전·후 한 줄이라도 적어두자고 다짐했다. 이번엔 그 반대였다. 팔았는데 왜 팔았는지 모르는 자리에 서 있었다. 분명히 내가 누른 매도 버튼인데, 그 순간의 생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남은 건 매매내역서 한 줄뿐. "2025/11/12, KODEX 200, 보유분 절반 매도, @57,760".
그래서 거기서부터 다시 따라가봤다.
매매기록이 보여준 사이클
11월 내 매매를 시간순으로 뽑아봤다.
- 11/3 — B계좌에 KODEX 200 신규 매수 (@57,415). 코스피 4,150선.
- 11/12 — A계좌의 KODEX 200 보유분 절반 익절 (@57,760)
- 11/12 같은 날 — 곧바로 KODEX KRW CASH PLUS(단기채)로 익절 대금 대부분을 옮김
- 11/20 — B계좌에 삼성전자 신규 진입 (@98,600)
- 11/25 — 해외 ETF 정리 시작. SCHW US DIV / ST STR SPDR 매도
- 11/27 — 단기채 절반을 다시 매도 → KODEX 200 일부 재매수 (@54,525) + TIGER 미국S&P500 신규 매수
- 12/1 — ACE KRX 금현물 일부 매도
이 패턴이 무엇인지 한참 들여다봤다. 그제야 보였다.
"절반 익절 → 단기채로 보존 → 조정 시 재진입" 사이클
11/12에 절반 익절을 한 돈은 현금으로 두지 않았다. 같은 날 KODEX 단기채로 옮겨놓았다. 시장에서 반쯤 빠져나간 동시에, 그 돈이 놀지 않게 단기채에 임시 주차한 셈이다.
그러고 정확히 보름 뒤. KODEX 200 가격이 11/12 매도가(@57,760)에서 11/27 시점 54,525원까지 약 -5.6% 조정받았다. 그때 단기채 일부를 매도해서 KODEX 200을 더 싼 값에 일부 다시 사들였다. 동시에 TIGER 미국S&P500을 새로 담아 자산을 한 번 더 분산했다.
이 사이클을 보고 솔직히 살짝 놀랐다. 누가 정해준 매뉴얼대로 움직인 것 같았다. 단기 고점 익절 → 실탄 보존 → 조정 시 저가 재진입 → 분산. 거의 교과서.
그런데 그걸 한 사람이 나다.
그날 시장은 무슨 일이 있었나
기억은 비어있어도 시장 데이터는 남아있다. 11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 한국 증시는 약 -9% 조정을 받았다. 미국에서 AI 버블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외국인이 매도세로 돌아섰다. 11월 12일 이후 코스피가 4,100선을 회복하는 데 약 6 거래일이 걸렸다. (다음 회복은 12월 22일, 외국인이 다시 매수로 돌아서면서였다.)
내가 그날 어떤 뉴스를 봤는지, 어떤 차트를 봤는지, 누구의 영상을 봤는지 — 기억이 한 톨도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장이 단기 고점이라는 신호를 어디선가 본 것은 확실하다. 안 그랬으면 -9% 조정 직전에 절반을 정리할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한 일을 내가 모르고 있었다
이게 묘한 지점이다.
분명히 내가 손으로 매수·매도 버튼을 눌렀다. 분명히 내가 그날 어떤 판단을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판단의 내용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남은 건 결과로 본 패턴뿐이다.
이건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 6개월쯤 지나면 그날의 판단 근거는 거의 통째로 증발한다. 기억은 "왜 했는지"보다 "결과가 어땠는지"만 남긴다. 동기는 사라지고 결과만 남는다.
둘. 그래도 내 손은 원칙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매뉴얼을 누가 외워서 알려준 것도 아닌데, 한 해 가까이 시장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몸이 익혔던 무언가가 그날 작동한 것 같다. 의식이 그게 뭐였는지는 기억 못 해도, 무의식 어딘가에 새겨진 매뉴얼이 손을 움직였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나
이번 발견에서 두 가지 결심이 더 굳어졌다.
첫째, 매수든 매도든 그날의 신호를 한 줄이라도 적어두자. 동기는 정말 한 달도 못 가서 증발한다. 기록이 없으면 내가 잘한 것도 알 수 없다. 잘한 것을 알 수 없으면 다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둘째, 그래도 너무 자책하지 말자. 내가 기억 못 한다고 해서 무지성으로 행동한 게 아니다. 시간 쌓아 만든 원칙이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 매매기록이 그걸 증명해줬다.
마무리 — 기록은 증거다
기억은 이야기를 만든다. 결과에 맞춰 동기를 다시 짠다.
매매기록은 증거를 남긴다. 그날 내가 진짜로 한 일. 사후 해석이 끼어들기 전의 날것.
이 둘이 부딪힐 때 기록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기록을 펴봐서 내가 잘한 사이클이 있었으면 그걸 다음에 또 쓸 수 있게 한 줄 적어두자.
내가 한 일을 내가 알아야, 다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기록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우리, 같이 살아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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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 survive. We can surv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