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살아남기

ADHD인 내가 AI로 살아남는 법 — 산만한 뇌를 작업 구조로 바꾸기

캔서방 2026. 6. 1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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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나는 ADHD가 있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정식으로 진단받은 건 아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주의가 산만하다", "한 가지에 집중을 못 한다"는 말을 지겹게 들었고, 커서도 그 패턴은 그대로였다. 조용하면 불안하고, 일하다 한 번 끊기면 다시 돌아오는 게 너무 힘들다. 그리고 한 번 씩 집중하게 되면, 몇시간이고 그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 그러다 멈출 수 없는 흐름이 끝나고 나면, 녹초가 된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그런 나를 데리고 살아남기 위해 내 나름의 방법들을 하나씩 개발해왔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먼저 분명히 해둘 것. 나는 의사가 아니고, 이 글은 진단이나 처방이 아니라 내 경험담이다. 비슷한 패턴이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라면 전문가를 한번 만나보는 게 정확하다. 다만 나처럼 "왜 나는 이럴까" 싶은 사람에게, 진단지가 아니라 실제로 굴러가는 생활 방식이 작은 힌트가 되면 좋겠다.

고요하면 불안한 뇌

나는 내면이 고요해지면 불안하다. 아예 잠을 자는게 아니라면, 혼자 조용히 있으면 불안해지고, 불편하다. 팟캐스트를 듣든, 노래를 듣든, 뭐라도 틀어놔야 마음이 놓인다. 알아보니 이건 ADHD 성향에서 흔히 보고되는 패턴이라고 한다. 산만한 뇌는 자극이 부족한 상태를 못 견뎌서, 조용해지면 머릿속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들고, 그걸 가리려고 또 다른 자극을 찾는다.

어릴 때는 이게 그냥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책이었다. 산만한 건 고쳐야 할 결함이라고 배웠으니까. 그런데 살다 보니 깨달은 게 있다. 기질 자체를 바꾸려는 싸움은 거의 이기지 못한다. 대신 그 기질이 "결과"로 표출되는 지점을 바꾸면, 같은 뇌를 가지고도 훨씬 잘 살아남을 수 있더라는 것.

기억을 머리 밖으로 꺼내기

내가 제일 먼저 효과를 본 건 아주 단순한 거였다. 지갑을 항상 같은 자리에 두는 것. 예전엔 지갑을 어디 뒀는지 매번 기억으로 쫓아다녔는데, "지갑은 무조건 이 자리"라는 규칙을 만들고 나서는 잃어버리는 일이 사라졌다.

원리는 두 가지였다. ADHD에서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건 의지나 성의 문제가 아니라 작업기억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억할 일을 환경으로 옮겨버리면, 약한 기억력에 계속 부담을 주는 대신 기억할 필요 자체가 사라진다. 또 하나는 "들어오면 → 여기 둔다"가 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이 되어, 매번 "어디 둘까" 고민하는 결정 지점을 지워버린 것이다.

이걸 할 일 관리로 확장했다. 해야 하는 일이지만, 지금 못 하는 일, 혹은 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서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때때로 덜 중요하고, 덜 급한 일들은 workflowy에 적어버리고 그냥 잊는다. 머릿속에 여러 항목을 띄워두는 게 나한테는 제일 큰 부담이라, 적어두면 "이건 시스템이 기억해주니까 내가 안 들고 있어도 된다"는 신호가 와서 마음이 편해진다. 산만한 뇌에서는 미처리 항목이 머릿속을 떠다니는 것만으로도 가만히 있어도 뇌가 시끄러워진다. 처음에 말한 "고요하면 불안하다"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나는 Workflowy에 적어놓고, "내가 지금 뭘 해야 하지?" 싶을 때마다 그걸 열어보는 습관을 만들었다. 막막함이 올라오는 그 순간이 곧 "목록을 연다"는 신호가 되도록 연결해둔 거다. 적어두면 그 목록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다는 ADHD의 흔한 함정을, 알람 없이 트리거 하나로 푼 셈이다. 그리고 하나씩 체크해가며 일한다. 끝낸 항목이 시야에서 정리되니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가 늘 눈에 보이고, 체크하는 순간의 작은 완료감이 다음으로 넘어갈 동력이 된다. ADHD 뇌가 약한 "보상 없이 꾸준히"를, 작은 보상을 잘게 깔아 보완한 셈이다. 그래서 길을 잃지 않는다.

AI를 쓰면서 강렬해진 변화

진짜 변화는 AI를 일상 도구로 쓰면서 왔다. 나는 일하다 중간에 끊기면 다시 그 일로 돌아가는 게 정말 힘든 사람이다. 보통 사람도 방해받으면 다시 몰입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ADHD에서는 "내가 뭘 하던 중이었지, 어디까지 했지" 하는 맥락 자체가 통째로 날아가서 복귀 비용이 훨씬 크다.

그런데 AI를 쓰면서 동시에 두세 가지 일을 굴릴 수 있게 됐다. 긴 글을 쓰는 중간에 이메일이 오거나 전화를 받으면, 예전엔 다시 글로 돌아가는 게 고역이었다. 그런데 대화창에 내가 작업하던 흐름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끊긴 맥락을 머리로 재구성할 필요 없이 화면에서 그대로 집어 올린다. 지갑을 같은 자리에 두던 것과 똑같은 원리다. 약한 작업기억을 화면이라는 외부에 맡긴 것이다.

더 재밌는 건 따로 있다. 나는 산만함과 과몰입이라는, 서로 다른 두 약점을 같이 가지고 있다. 단조로운 한 가지 일을 못 견디는 동시에, 한번 빠지면 못 빠져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여러 작업을 일부러 점프하면서 일하니까 이 둘이 서로 상쇄된다. AI가 답을 만드는 1~3분의 대기 시간을 다른 작업으로 채우니 자극 결핍이 안 생기고, 동시에 강제로 시선을 옮기게 되니 한 가지에 과몰입해서 못 빠져나오는 것도 막아준다. 산만함을 약점이 아니라 작업 전환의 연료로 쓰고 있는 셈이다.

처음엔 입력 하나 해놓고 답을 기다리는 그 1분이 너무 괴로웠다. 그 빈 시간에 다른 일이 끼어드는 것도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두세 가지를 동시에 놓고, 하나에서 다음으로 일부러 점프하며 일한다.

기다림이 쉼표가 되다

여기서 가장 신기했던 건, 그 "기다리는 시간"의 의미가 완전히 뒤집혔다는 점이다.

이메일 답장이나 코드 개발 같은, 비교적 독립적인 일들은 이 점프 방식이 확실히 능률을 올려준다. 한 작업이 막히거나 대기 상태일 때 다른 작업으로 넘어가도 잃을 맥락이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에 과몰입했다가 끝나면 녹초가 되는 탈진 현상도 눈에 띄게 줄었다. 강제로 시선을 옮기니 과몰입이 누적되기 전에 끊어지는, 일종의 자연스러운 페이싱 장치가 생긴 거다.

예전에 "못 견디던 빈 시간"이 이제는 몰입과 몰입 사이의 회복 구간이 됐다. 같은 1~10분인데 역할이 정반대가 된 것이다.

깊은 글쓰기는 '긴 호흡'으로

다만 모든 일을 점프하며 하는 건 아니다. 깊은 글 한 편을 논리적으로 쌓아가는 작업은 결이 다르다. 처음엔 나도 "이런 건 끊지 말고 길게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내 방식을 들여다보니 좀 달랐다.

이런 글쓰기는 사실 긴 호흡 단위의 사이클 작업이다. 내가 AI에게 줄 내용을 길게 정리해서 한 번에 쏟아낸다(집중·출력) → 보낸다 →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물을 마시거나 음악을 바꾸거나 짧게 다른 일을 한다 → 응답을 보고 다음 호흡으로 들어간다. 이 한 호흡이 한 세션이 되고, 5분이 되기도 10분이 되기도 한다.

이게 과몰입으로 안 빠지는 이유는, 한 호흡을 뱉을 때마다 구조적으로 쉼표가 찍히기 때문이다. 끊지 말아야 할 건 한 호흡 안의 출력이지, 호흡과 호흡 사이는 오히려 끊어주는 게 나한테는 더 낫다. 출력의 강도는 높지만 매 사이클마다 리셋이 되니 탈진이 쌓이지 않는다.

내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면

언젠가부터 나는 내 뇌를 컴퓨터 칩에 비유하게 됐다. 어디까지나 나 한 사람에 한정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내가 왜 그런 식으로 일하는지가 한층 선명해졌다.

먼저 메모리(RAM)가 작다. 한 번에 여러 개를 띄워놓고 작업하는 게 버겁다. 그래서 머릿속에 올려둔 걸 자꾸 떨어뜨린다. 외부 저장 — Workflowy나 대화창 — 에 스왑하는 게 그렇게 잘 맞았던 이유다.

코어 수도 적다. 진짜 의미의 병렬 처리, 그러니까 두세 가지를 정말 동시에 굴리는 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앞에서 "동시에 여러 일을 굴린다"고 한 건 사실 동시 처리가 아니었다. 코어 하나를 이 작업 저 작업으로 빠르게 옮겨 붙이는 것에 가깝다. 코어가 많아 동시에 돌리는 게 아니라, 단일 코어를 빠르게 점프시키는 것.

그런데 클럭은 높다. 하나에 일단 락이 걸리면 처리가 빠르고 깊게 치고 나간다. 긴 글 한 편을 한 호흡으로 쏟아낼 때가 딱 이 상태다.

문제는 클럭이 높아서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어진다는 것. 가속이 붙어 스스로 못 멈춘다. 몇 시간이고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끝나면 녹초가 된다. 하이퍼포커스의 폭발력이자 위험이다.

마지막으로 재시동 비용이 크다. 클럭이 높고 연산이 깊게 진행될수록, 누가 방해해 그게 끊기는 순간 날아가는 양도 크고, 다시 그 속도까지 끌어올리는 데 드는 비용도 크다. RAM도 작으니 끊긴 맥락을 머리로 복원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인터럽트가 들어오면 재시동이 유독 힘들다.

신기한 건, 내가 그동안 만들어온 방법들이 전부 이 칩 스펙에 대한 대응이었다는 점이다. 작은 RAM은 외부 메모리로 스왑하고, 적은 코어는 동시 처리 대신 빠른 점프로 굴리고, 높은 클럭의 폭주는 호흡 단위로 끊어 식히고, 큰 재시동 비용은 화면에 맥락을 남겨 복원을 싸게 만든다. 칩 자체는 바꿀 수 없으니, 그 칩에 맞는 운영체제를 직접 짠 셈이다.

마무리 — 약점이 아니라 운영법

정리하면 이렇다. 깊게 통합해야 하는 작업은 긴 호흡으로 한 호흡씩, 병렬이 가능한 일상 작업은 의도적으로 점프하며. 그리고 그 사이사이 기억은 머리 밖(메모·화면)에 맡긴다.

흔한 ADHD 조언이 내게 잘 안 맞았던 이유도 여기 있는 것 같다. 많은 조언이 "코어를 늘려라(멀티태스킹 해라)"거나 "클럭을 낮춰라(천천히, 꾸준히 해라)" 쪽인데, 정작 내게 맞았던 건 클럭은 그대로 살리되 인터럽트만 관리하는 방향이었다. 내 칩의 스펙을 남의 것에 맞추려 하지 않은 게 핵심이었던 거다.

나는 오랫동안 산만함을 고쳐야 할 결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ADHD를 "없애는" 게 목표가 아니라, 그 성향에 맞게 환경과 도구를 짜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니 일이 훨씬 잘 굴러간다. 타고난 기질은 그대로지만, 그게 "일을 못 끝냄"이라는 결과로 표출되는 걸 차단한 것이다. 진단지가 있든 없든, 결국 나를 데리고 살아남는 건 내가 만든 시스템이었다.

캐나다에서 혼자 일을 굴리며 살아남는 사람이라면, 특히 어릴 때부터 산만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면, 한번 해보시길. 뇌를 고치려 애쓰는 대신, 내 칩 스펙을 파악하고 거기 맞는 운영체제를 깔아주는 것. 그게 ADHD인 내가 찾은 살아남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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